47. 현대 설교의 문제 (3)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47

현대 설교의 문제(3)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28)>

 

앞에서 현대 강단 설교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말씀의 사역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현대 설교의 뿌리는 신약성경과 초대교회의 사역자들이 아닌 그리스 수사학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수사학임은 역사적으로 보나 설교 방식으로 보나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대 설교가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유기적 교회가 세워지는 데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알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말씀의 사역으로 회귀해야 합니다.

즉, 앞에서 계속 강조했던 것처럼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권고한 말을 귀담아 듣고 실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골 3:16)

 

이렇게 교회 안의 모든 성도가 피차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는 유기적인 모임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전에는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현대 설교가 유기적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어떻게 방해하는지 간추려보겠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현대 설교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랭크 바이올라의 책 이교에 물든 기독교의 153-156 페이지에 이것을 잘 요약해놓았므로 여기에 소개합니다:

 

설교가 교회에 어떤 손상을 입혔는가?

 

전통적인 설교는 지난 5세기 동안 숭상을 받아왔지만 여러 면에서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첫째, 설교는 설교자를 교회 정기모임의 주도자로 만든다. 그 결과 회중의 참여는 잘 봐줘서 훼방을 받고, 나쁘게 보면 아예 제외된다.

설교는 교회를 설교소로 탈바꿈시킨다. 회중은 공연구경을 하는 벙어리 구경꾼 집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설교자가 설교하는 도중에는 중단을 시키거나 질문을 하거나 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설교는 그리스도의 몸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얼어붙게 하고 가둬놓는다. 그것은 설교자들이 주마다 교회모임을 좌지우지하도록 허용함으로 말미암아 유순하게 길든 제사장들만 길러낸다.

 

둘째, 설교는 종종 영적 성장을 교착상태에 빠뜨린다. 설교는 일방적인 선포이기 때문에, 수동성을 조장한다. 그리고 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것은 지체들 상호 간의 사역을 질식시켜 버리고, 회중의 자유로운 참여를 꽉 막아 버린다. 결국, 하나님 사람들의 영적 성장을 급강하시켜 추락하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하게 되려면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막 4:24-25과 히 10:24-25를 참조). 우리는 주마다 수동적으로 듣는 것에 의해 성장할 수 없다.

사실, 신약성서 스타일로 말씀을 전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의 목표 중 하나는 우리 각 사람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엡 4:11-16). 그것은 교회모임에서 우리의 입을 열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고전 12-14장). 전통적인 설교는 이런 작업 자체를 방해한다.

 

셋째, 설교는 비성서적인 성직자 사고방식을 보존시킨다. 그것은 과도하게 또는 병적으로 성직자에게 의존하게 한다.

설교는 설교자를 종교 전문가가 되게 한다 – 합당한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다른 사람은 모두 입 다물고 의자만 따뜻하게 만드는 2등 그리스도인으로 취급받게 한다. (보통 이것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그것이 현실인 것은 어쩔 수 없다.)

지체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데, 목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다른 지체들에게 배울 수 있겠는가? 설교 도중 지체들이 아무런 질문도 할 수 없는데, 교회가 어떻게 목사에게서 배울 수 있겠는가? 형제들과 자매들이 모임에서 입에 재갈을 물고 있는데, 어떻게 상호 간에 배울 수 있겠는가?

설교는 ‘교회’를 멀어지게 하고 비인격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목사가 교회에서 공급받을 수 있는 영적 자양분을 빼앗아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 안에서 상호 간에 영적 양식을 주고받는 것을 차단해 버린다.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설교는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가장 큰 걸림돌 중의 하나이다.

 

넷째 설교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막일꾼으로 만든다. 목사들이 아무리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를 계속 부르짖는다 해도, 엄연한 진실은 매주 전해지는 오늘날의 설교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 영적 사역 및 제 기능을 발휘할 힘을 거의 다 빼버린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의 사람들 상당수는 목사들이 설교에 중독된 것 못지않게 설교 듣는 것에 중독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약성서 스타일의 말씀선포와 가르침은 교회가 성직자 없이도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준비해 준다…

 

다섯째, 오늘날의 설교는 종종 비현실적이다. 너무나도 많은 설교자가 자신은 경험해본 적도 없는 것을 마치 전문가인 것처럼 말한다.

설교가 추상적 또는 이론적이거나, 경건하거나 또는 영감을 주거나, 강압적이거나 또는 지나치거나, 흥미롭거나 또는 재미있거나, 들은 설교를 직접 실제로 경험하기엔 역부족이다.

따라서 전형적인 설교는 마른 땅에서 수영강습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어떤 실제적인 가치도 빠져 있다. 설교가 엄청나게 발사되지만 명중한 적은 별로 없다.

설교 대부분은 전두엽을 겨냥하고 있다. 현대 설교는 일반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고, 신자들이 들은 말씀을 경험하고 적용하도록 준비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그 진짜 아버지인 그리스와 로마식 수사학을 반영한다. 그리스와 로마식 수사학은 온갖 추상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교훈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재능을 계발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즐기거나 천재적 재주를 드러내고자 설계된 방식이다.”

오늘날의 세련된 설교가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의지를 발동시키고, 마음을 자극할 수는 있다. 그러나 팀이 작전회를 끝내고 그다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거의 보여주지 못한다.

이 모든 것에서, 오늘날의 설교는 그것이 약속하는 영적 성장을 고취한다는 선전에는 미치지 못하고 실패한다. 결국엔 설교가 교회를 실제로 더욱 메마르게 한다. 설교는 순간적인 흥분제처럼 작용한다. 그 효과는 길어야 며칠이다.

 

우리는 솔직해야 한다. 수십 년 동안 설교를 들은 수도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이 아직도 그리스도 안의 젖먹이로 남아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매주 설교를 듣는다 해서 변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늘 만나는 것을 통해 변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전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지, 주님에 관한 정보의 전달을 위해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말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자 할 뿐만 아니라 듣는 자들에게 어떻게 주님을 경험하고, 알고, 따르고, 섬기는 지를 보여주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오늘날의 설교엔 이런 지극히 중요한 요소들이 너무나도 빠져 있다.

 

만일 설교자가 그의 청중을 그가 외치는바 살아 있는 영적 경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가 전한 메시지의 효력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설교자는 많이 없어도 되고, 더 많은 영적 조력자가 있어야 한다. 교회에는 그리스도를 바로 전하고 그 전해진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사람들이 경험하도록 인도할 줄 아는 사람들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리고 그 위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 덕을 세우려면 이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다른 지체들과 어떻게 나누는지에 대한 지침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신약성서적 관습인 지체 간의 상호 권면과 상호 사역의 회복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에는 영적 변화가 이 두 가지에 달렸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 안에 가르치는 은사가 있었지만, 특별히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뿐 아니라 (엡4:11; 약 3:1) 모든 성도에게서 가르침이 나왔다 (고전 4:26, 31).

우리가 가르침이 전통적인 설교의 형식을 취하도록 허용하고 그것을 전문적인 연설가 계층에 국한할 때, 우리는 성서의 울타리 밖으로 한참 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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