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현대 설교의 문제 (6)

 

***이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의 요청으로  2010년 가을부터  2013년 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짜리 교회 50

현대 설교의 문제 (6)

<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31)>

 

현대 설교의 문제를 논할 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앞에서 끊임 없이 언급했고 또 언급했던 ‘proof texting(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관계 없는 성경의 부분을 맘대로 잘라다가 사용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제기하고 강조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성경으로 증명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상관도 없는 구절들을 뽑아다가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모자이크식 또는 프랑켄슈타인식 설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모자이크식 또는 프랑켄슈타인식 설교

 

이 글의 앞부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누구나 초등학교 다닐 때 방학 숙제로 모자이크를 해본 적이 한번 쯤은 있을 것입니다. 먼저 도화지에 그리고자 하는 그림의 스케치를 한 다음 그 그림에 맞는 색깔을 여기저기에서 찢어 갖다 붙이는 모자이크 말입니다.

그림책에서, 상표에서, 잡지에서, 카탈로그에서, 광고지에서… 비슷한 색깔이면 뭐든지 찢어다가 붙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럴 듯한 작품이 완성되는데, 원래 그것들은 나의 작품을 위해 존재했던 것들이 아닌데도 그런 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미술의 모자이크 기법입니다. 예술 작품을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해도 됩니다.

 

그러나 설교에서 나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성경 구절을 이렇게 모자이크식으로 갖다 붙이면 곤란합니다. 메시지의 전달은 예술이 아닌데도 예술(앞에서 말한 공연 예술)로 탈바꿈했기 때문에 이런 모자이크식 설교가 판을 칩니다.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관련이 있는 구절의 인용은 당연한 것이고, 또 이해를 돕기 위해 필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으므로 서로 관련 있는 구절 또한 무궁무진하게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런 구절들은 서로를 뒷받침해줘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드러나게 하므로 의당 인용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구절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도 언제나 존재할 수 있으므로 무조건 인용하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말하려는 바를 뒷받침해주지 않는 전혀 무관한 구절을 상관 있는 것처럼 갖다 붙이는 문제를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필자는 모자이크식 설교라는 말 이외에도 프랑켄슈타인식 설교라고 칭합니다. 이것 또한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영국의 메리 셜리라는 여자 소설가가 2백 년 전에 쓴 소설의 주인공 프랑켄슈타인 박사에서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이 여러 사람의 시체에서 이 부분, 저 부분을 잘라다가 붙여 사람이 아닌 괴물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는 영화로도 많이 나와서 유명하므로 프랑켄슈타인식 설교가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릴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고,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렇게 모자이크식 또는 프랑켄슈타인식으로 상관도 없는 구절을 뽑아다가 사용하는 것을 proof texting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뽑아다가 사용하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아예 설교 본문 자체에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대입해서 주장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꼭 설교에서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 모든 영역에서 누구나 항상 범하기 쉬운 잘못이기 때문에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유기적인 교회생활 속에서 피차 가르치고 권할 때도 얼마든지 이런 식으로 성경을 잘못 인용하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proof texting의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정말 심각한 주제입니다.

 

 

흔히 범하는 proof texting의 예

 

Proof texting의 예는 한도 끝도 없이 많지만 그중 흔히 범하는 오류 중 하나로, 앞에서 여러 번 언급했던 것처럼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이 신구약 여기저기서 구절을 뽑아다가 만들어낸 종말론을 들 수 있습니다. 주로 구약의 에스겔과 다니엘, 신약의 공관복음, 데살로니가 전후서, 요한계시록 등에 있는 많은 내용과 구절들이 그들의 종말론을 증명하는데 proof text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서로 상관 없는 구절들인데도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프랑켄슈타인식 짜집기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완전 괴물 종말론이 생겨나서 수많은 순진한 그리스도인을 겁먹게 하고, 엉뚱한데 초점을 맞추게 해서 하나님의 목적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전념하지 못하게 하여 인생을 낭비하게 만듭니다.

성경을 가지고 이런 종말론을 주장하며 설교를 통해 열변을 토하면 교인들은 십중팔구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양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또 하나의 흔한 예

 

아마도 proof texting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경우의 예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불신자에게 전도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알도록 얘기해주는 것은 정말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이것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신자에게 명령하신 것이므로 전도를 하지 않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강단에서 끊임 없이 부르짖는 소리에 주눅이 들어 있는 교인들이 많은데, 이것도 proof texting의 결과입니다.

일주일 내내 바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날 이것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 죄의식이 생겨서 “지금부터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 시간을 내서 꼭 전도하리라”고 다짐을 해보지만, 역시 실천이 되지 않아서 죄의식만 가중시키는 고약한 이론입니다.

 

아니면 전도(사실은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고 교회당으로 사람들을 데려왔을 뿐인데 전도했다고 착각함)를 잘 했다고 상을 주고, “전도왕”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하는 등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집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되면 상당수의 사람들은 열등감 때문에 죄의식이 더 생깁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도를 잘 못하는 것에 대해 이리저리 합리화하기에 바쁩니다. 아름다워야 할 복음전도가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만들어버리다니…

 

하지만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는 것을 최대 목표로 하는 미국에서 가장 큰 교단에 속했던 저도 이전에 근 20년 동안 목회하면서 이것을 아주 많이 강조해서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했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이전의 필자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proof texting  입니까? 주님께서 전도를 명령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무슨 사이비, 이단, 삼단 같은 소리를 하고 있습니까???

전도하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라고 주장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본문은 아마 아래의 구절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소위 ‘지상명령’ 이라는 제목이 붙은 내용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여기서 헬라어 원문에는 명령형 동사가 하나입니다: “제자를 삼아”의 “삼으라” 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동사는 분사로써 제자를 삼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면서, 침례(세례)를 베풀면서,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면서. “제자를 삼으라!” 명령 맞습니다. 명령은 꼭 지켜야 합니다. 지키지 않으면 불순종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명령을 할 때는 꼭 대상이 있습니다. 공중에다 대고 명령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누구에게 명령을 하셨는지가 중요합니다. 성경에 써있다고 “다 오늘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라고 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소위 큐티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하니까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오라”고 명하셨다고 죽은 시체들이 너도 나도 다 나오면 곤란합니다. 그건 죽은 나사로에게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걸으라”고 명하셨다 해서 오늘날 신유집회 같은 데서 목발을 부러뜨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며칠 후에 보면 도로 목발 짚고 다닌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마태복음 28:18-20은 누구를 대상으로 하신 말씀일까요? “그건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하신 말씀입니다” 라고 한다면, 이런 걸 proof texting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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