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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

영생을 맛보는가, 누리는가? (9)

 

 니모를 찾아서 1

 

십년 전에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한 ‘니모를 찾아서(Finding Nemo)’ 라는 유명한 만화 영화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호초가 있는 드넓은 바다에 살던 니모라는 클라운피시(clownfish)가 잡혀가서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어느 치과병원에 있는 어항에 갇혔다가 갖은 노력 끝에 탈출해 나오는 이야기를 줄거리로 한 영화입니다.

 

니모가 살던 서식지는 대양의 산호초 밑에서 자라는 말미잘 군이었는데 사람에게 잡혀와서 인공으로 만든 답답한 어항 속에 갇혀 좁디좁은 공간에서 다른 물고기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했습니다.

또 심술궂은 여자 아이를 만나 플라스틱 백으로 옯겨져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신세가 될뻔 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잃어버린 자식을 찾아 나선 아빠 말린의 간절함이 어항 속의 니모에게 전달되어 친구들의 도움으로 결국 치과의 입세척용 세수대로 점프해서 물을 타고 하수구로 내려가 탈출에 성공하게 됩니다.

 

니모를 찾아서 4니모를 찾아서 3니모를 찾아서 5 finding nemo 2

 

그런데 어항 속에 갇힌 물고기 니모가 자신의 서식지가 아닌 어항 안에서도 물고기로서의 생명은 대충 유지하며 살 수 있었음을 아십니까?

어항 안에도 물이 있고, 수초도 있고, 기계를 작동시켜 공급해주는 산소도 있고, 또 사람들이 시간 맞춰서 먹이도 주고, 때에 따라 청소도 해주고… 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목숨은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 안에 다른 물고기들도 있기 때문에 친교(?)도 하며 외로움을 달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물고기로서의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빠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산호초 사이를 누비면서 자기가 먹이를 찾아 먹으며 클라운피시로서의 생명을 최대한 누리며 살아야 할 니모가 비좁은 어항 속의 형편 무인지경인 인공적 환경에서 사람이 던져주는 고깃밥을 받아 먹어야 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클라운피시로서의 본능은 제한 당한 채 물고기의 생명을 조금 맛보는 정도에 그치고 그 생명을 마음껏 발휘하거나 누리지는 못하는 운명에 처한 것입니다.

이것은 물고기뿐만 아니라 새장 속에 갇혀있는 새나, 철창 안에 갇혀있는 사자나, 수조(pool) 속에 갇혀있는 돌고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에서 살아야 할 동물들을 가둬놓아도 그들이 목숨은 연명할 수 있지만 그들 생명의 본능대로 살 수 있는 고유의 서식지가 아닌 이상 생명을 마음껏 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새장동물원 사자돌고래쇼

 

그런데 이것이 혹시 오늘날 아직도 기독교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 영생을 맛보기는 했으나 그 영생을 마음껏 누리지는 못하는 상태.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사는 거주지가 아닌 엉뚱한 곳에서 틀에 갇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랭크 바이올라는 그의 책 영원에서 지상으로 에서 이것에 대해 잘 설명합니다.

아래는 이 책의 194-195 쪽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 생물을 고유의 서식지에서 다른 환경으로 옮겨놓으면 그 생물은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된다. 생존은 시킬 수 있어도 타고난 본능과 기능 일부분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할 것이다.

 

당신과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가 새로운 인류의 종족에 속한다.

우리는 ‘새로운 종(species)’, 곧 새로 생긴 인종이라 할 수 있다 (고후 5:17; 갈 3:28; 골 3:11; 엡 2:15).

그래서, 새로운 종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유한 서식지(거주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에클레시아(ekklesia) 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가진 성경에 ‘교회’ 라고 번역되어 있다.

 

1세기 때 에클레시아 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아래 정기적으로 모여 공동체로서 나눔의 삶을 살던 그리스도인들의 지역 모임을 지칭했다.

(여기서 ‘공동체’로 번역된 단어는 영어로 ‘community’ 인데, 우리말의 ‘공동체’는 자칫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이 말이 흔히 공동생활 또는 집단생활을 하는 무리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곤 하는데, 이 책에서는 그런 뜻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자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어 가는 교회를 뜻하는 말이다. – 역자 주)

 

에클레시아는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교단도 아니다. 그것은 교회 예배도 아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로 살며 정기적으로 함께 모이는 지역 모임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고유의 거주지를 갖고 있다.

 

내가 짐작하기에는, 우리는 지난 1700년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타고난 거주지를 대부분 약탈당하고 말았다. 인간의 손이 그 거주지를 파고하고 인공 거주지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 라고 부르는 것은 많은 경우 우리의 고유한 거주지가 아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그 고유의 거주지 밖에서는 잘 유지될 수 없다.

오렌지 나무가 남극대륙에서 살 수 없듯이, 당신과 나도 에클레시아 밖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

 

영원에서 지상으로

 

에클레시아는 이 지구 출신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세계에서 시작된 존재이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기독교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이 부자연스런 거주지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species)에 맞지 않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 결과, 영적으로 죽는 그리스도인들도 있고, 살아는 있지만 영적본능은 도태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많다.

총체적 결과로 그들은 비정상적인 영적 삶을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런 비정상적인 거주지에 살고 있는 자녀들을 볼 때 얼마나 안타까워 하실까요?

잃은 자식 니모를 찾아나선 아빠 말린의 간절함이 어항 속에 갇혀있던 니모에게 전달되었듯이, 엉뚱한 거주지가 전부인줄 알고 기독교 전통의 틀에 갇혀 살아가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에 걸맞은 고유의 거주지에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절함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 또한 니모처럼 그런 잘못된 거주지를 과감하게 탈출하여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에클레시아 라는 거주지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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