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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

억지로 갖다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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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3월 14일을 기념일로 하는 Pi Day 라는 것을 아십니까?

기하학에서 원주의 길이를 계산할 때 지름에 곱하는 pi인 3.1415926535…… 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날이 되면 Pi와 발음이 같고 또 원형으로 된 Pie를 먹으며 파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100년에 한번 돌아오는 Pi Day 라 하여 흥분한 사람들이 미국에 있습니다.

엊그제인 2015년 3월 14일이 미국식 날짜 표기로 3.14.15 가 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미국에선 년.월.일 순이 아닌 월.일.년 순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앞으로 100년 후인 2115년이 되어야만 다시 돌아오는 날이라 하여 카운트다운까지 하며 난리를 쳤습니다.

 

카운트다운도 2015년 3월 14일 오전과 오후, 이렇게 두 번 했는데 그것도 9시 26분 53초에 하는게 맞다는 측과 9시 26분 54초에 하는게 맞다는 측이 나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53 다음에 오는게 5 이므로 반올림해야 된다는 측과 53에서 끊어야 된다는 측의 의견이 엇갈리기 때문이랍니다.

참 밥 먹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것을 억지로 갖다붙여서 흥분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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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억지로 갖다붙여서 Pi Day를 만드는 것이야 물론 자유에 속합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초콜릿 장삿꾼들이 만든 3월 14일을 무슨 ‘화이트데이’ 라며 기념하기도 하는데, 다 그들의 자유에 속하겠지요.

 

하지만 성경 말씀을 억지로 갖다붙여 적용함으로 오는 신앙의 피해는 심각하기 때문에 잘 분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 본문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다든지, 또는 성경 여기저기서 떼어다가 갖다붙이는 소위 proof texting 이라는 것 말입니다.

 

이전에 빌리 그레이엄이 전도집회에서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인 비유를 자기 맘대로 갖다 붙여 해석해서 전하는 메시지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은 아담이고, 강도는 마귀이고,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고 상처를 싸매준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고, 포도주는 성령이고, 주막은 교회이고, 사마리아인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고… 뭐 이런 식의 지나친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그런 뜻이 아닌 예수님의 비유를 빌리 그레이엄이 억지로 갖다붙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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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식의 ‘억지로 갖다붙이기’가 때로는 크나큰 오류를 범하게 해서 복음을 변질시키고 신앙을 망치게 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성경의 여기저기서 구절을 떼어다가 갖다붙여 만든 ‘세대주의 종말론’을 들 수 있습니다.

주로 구약의 에스겔과 다니엘, 신약의 공관복음, 데살로니가 전후서, 요한계시록 등에 있는 많은 내용과 구절이 그들의 종말론을 증명하는데 proof text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서로 상관 없는 구절들인데도 말입니다.

 

이런 짜집기식 종말론이 생겨나서 수많은 순진한 그리스도인을 겁먹게 하고, 엉뚱한데 초점을 맞추게 해서 하나님의 목적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전념하지 못하게 하여 인생을 낭비하게 만듭니다.

이런 잘못된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이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 중에 많은데, 아주 심각한 영적 공해입니다.

저 자신도 한때는 이런 종말론을 그대로 믿었지만 복음을 점점 바로 알게 되면서 정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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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이런 잘못된 세대주의 종말론은 요한계시록을 오해해서 생기기 때문에 제가 <거품 빼고 보는 요한계시록> 이라는 책을 써서 바로 알리려 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억지로 갖다붙이기의 대표적인 또 하나의 예로, 요한복음 14:1-4을 따로 떼어 예수님께서 우리가 죽은 후에 가게 될 천국이라는 장소 또는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 잘못 해석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요한복음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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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은 우리가 이 땅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누리는 생명의 교제인 교회생활에 관해 예수님께서 설명하신 것인데, 흔히 전통적인 천국 개념을 이 본문에 갖다붙여서 “아버지 집”을 이 세상 밖에 있는 장소의 개념으로, “내가 다시 와서”를 재림의 개념으로 잘 못 이해한 나머지 이 말씀이 주로 장례식에서나 애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의 핵심을 말씀하신 것이 엉뚱한 해석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진수를 가리게끔 사용되니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억지로 갖다붙이기’가 치명적입니다.

복음을 변질시켜 아까운 인생을 엉뚱한 곳에서 낭비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해도 가능한 한 제대로 분별해서 치명적인 오류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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